제1화 모란
시방
우리 집 뜰에선
모란이 요란스럽게 웃고 있습니다.
기인 긴 봄날 보릿고갤 넘다 지쳐 샛거릴 얻으러 가는 아버질 따라 간 지주네집 뜨락에서도 요란스럽게 웃고 있던 모란이 어찌나 미웠던지 사뭇 도끼로 찍어내고 싶었다는 ‘산山’이란 놈의 슬픈 이야기가, 아득한 옛날에 들은 그 슬픈 이야기가 아직도 내 가슴에 안개처럼 머물러 있습니다.
보리 모가지가
무두룩히 올라오는 요맘때면
종달새도 모란처럼 요란스럽게 웁니다.
시방도 하늘 저편에서는 종달새가 자지러지게 울고 있습니다.
제2화 시나대
일로 이사 오던 해, 그러니까 벌써 십 년도 더 되나 봅니다. 바로 창 옆에, 그리고 담 지시락에 심은 시나대가 인젠 제법 무성하게 작은 대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비 오는 날에는 댓잎에 떨어지는 쇼팽의 전주곡 십오 번 같은 빗소리, 든 날에는 햇볕이 분수처럼 쏟아져 반짝반짝 빛나는 고 백금빛 이파리, 바람이 지날 때에는 잎새들이 서로 부딪쳐 사운대는 대바람 소리, 겨울이면 눈이 소복소복 쌓이는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이렇게 시나대랑 이웃하고 살다가 불현듯 떠나야 할 것을 문득 생각하고 시나대를 어린 손주처럼 쓰다듬어봅니다.
차라리 한 그루 시나대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뉘우치는 까닭인지도 모릅니다.
제3화 낙과
호랑가시 빨간 열매가 일 년 내내 달려 있다가 요즘에사 날마다 분주히 떨어지고 있습니다. 산호보다 예쁘디예쁜 열맵니다.
후덕지근한 봄날이면 호랑이가 어슬렁 나와 등이 몹시 근지러워서 호랑가시 육모 난 잎새에 등을 슬슬 문지른답니다. 그래서 ‘호랑이 등긁이 나무’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작년에는 겨우내 산새 한 마리가 날마다 찾아와서 호랑가시 열맬 따먹고 자고 가는 날도 많았습니다.
저 숱하게 떨어진 호랑가시 열매가 싹이 트고 자라서 열매가 열릴 무렵이면 몰라보게 세상도 뒤바뀔 것입니다.
아마 그때쯤엔 우리 어린 손주들이 장성해서 남북으로 갈라졌던 조국의 아득한 옛이야길 나누며 오순도순 살아가겠지요.
제4화 더덕
이끼 앉은 길 솟는 바위를 세우고, 그 옆에 가는잎맥문동細葉麥門冬과 더덕을 곁들여 심어놓았더니 꼭 산골 같다고들 합니다.
지리산에서 오래오래 살다 온 셋째 딸 선아의 친구 엄마가 여러 해 전에 가져 온 더덕이 인동 넝쿨이랑 얽혀서 바윌 칭칭 감고 올라갔습니다.
바위 옆에 얼씬거리다가 더덕 넝쿨에 스칠라치면 물씬 더덕 내음새가 들어오고, 갑자기 더덕이 먹고 싶어집니다.
저편 중학교 마당에서는 더덕 내음새도 잊어버린 입후보들이 모레
가 선거 날이라서 목청이 터져라 떠들어대고 있는 것이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제5화 태산목꽃
안에서는 오늘도 절에 가고, 아무도 없는 집이 절간처럼 적적합니다.
가지마다 맺은 꽃이 어제 오늘 꽃멍덕을 훌훌 벗고 나더니, 연두빛으로 부풀어 오른 봉오리가 내일 모렌 터질 것만 같습니다.
백련처럼 탐스러운 꽃이 오월부터 팔월 한하고 날이 날마다 이어 피는데, 그 향기가 어찌나 아기자기하게 들어오는지 날만 새면 태산목에 매달려 삽니다.
저렇게 향길 지닌 사람이 드물어서 세상은 엉망진창으로 시끄러운가 봅니다.
-창작과비평 1971.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