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인문사에서 첫 시집 촛불이 나왔습니다. 이 시집에는 당시 석정시인의 나이에 맞춰 33편이 수록되었습니다.
'가을이 먼 길을 떠나랴 하나니'는 1933년 12월 삼천리에 발표된 시입니다.>
가을이 지금은 먼 길을 떠나려 하나니
운모雲母처럼 투명한 바람에 이끌려
가을이 그 어느 먼 성좌를 넘어오더니
푸른 하늘의 대낮을 흰 달이 소리 없이 오고가며
밤이면 물결에 스쳐 나려가는 바둑돌처럼
흰 구름 엷은 사이사이로 푸른 별이 흘러갑데다
남국의 노란 은행 잎새들이
푸른 하늘을 순례한다 먼 길을 떠나기 비롯하면
산새의 노래 짙은 숲엔 밤알이 쌓인 잎새들을 조심히 밟고
묵은 산장山莊 붉은 감이 조용히 석양하늘을 바라볼 때
까마귀 맑은 소리 산을 넘어 들려옵데다
어머니
오늘은 고양이 졸음 조는
저 후원의 따뜻한 볕 아래서
흰 토기의 눈동자같이 붉은 석류 알을 쪼개어 먹으며
그리고 내일은 야장미野薔薇열매 붉은 저 숲길을 거닐며
가을이 남기는 이 현란絢爛한 풍경들을 이야기하지 않으렵니까
가을이 지금은 먼 길을 떠나려 하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