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羊에게 부치는 글
미美는 의義와 선善을 더불어 양 자羊字를 관冠하니라
당신은 눈부신 햇빛이 쏟아지는 넓은 초원을 흰 구름처럼 흘러가는 양떼를 본 일이 있습니까? 드높은 하늘에 흘러가는 저 흰 구름처럼 초록빛 벌판에 흩어져 유유히 풀을 뜯는 양떼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들의 정신위생을 위하여 얼마나 건강한 일이겠습니까? 이때만은 아예 당신들의 소란한 주변이나 어두운 현실을 당신의 머리에서 아주 잔인하게 추방해도 좋습니다. 목적牧笛의 구슬픈 가락에 따라 양떼는 언덕을 넘고 초원을 찾아 한가히 풀을 뜯고 때로는 그 순하디순한 눈망울 속에 푸른 하늘을 담아 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본시 조용했을 우리들의 청각엔 되도록 목적 소리를 듣기로 하고 호수처럼 맑아야 할 우리 시각에도 저 양떼처럼 푸른 하늘을 담아 본다는 것은 더할 수 없는 우리들의 정신 위생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시인들은 양떼를 흰 구름에 비유하여 노래하였고 저 대지의 화가 밀레도 양떼를 즐겨 화폭에 담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흔히 세상에서 가장 순한 사람을 대할 때에는 누구나 ‘양처럼 순하다’고 하는 말을 우리는 자주 듣고 있습니다. 승냥이떼가 득실거리는 세상이기에 우리는 양 같은 사람을 사랑하고 양같이 되기를 원하는 청정한 마음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주변에서 양 같은 사람이 날로 줄어가고 양 같이 순하던 눈망울이 승냥이 눈꼴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비극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흔히 백성을 양에 비하는 것까지는 좋으나 치자治者 있어 폭暴한 군주로 임한다면 더 견디기 어려운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의 양을 위하여 저 푸른 초원엔 승냥이의 그림자도 얼씬거리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들의 성스러운 소임이기에 말입니다. 나는 문득 저 헷세처럼 가뜩이나 무거운 머리를 눈 덮인 알프스 산기슭을 오가는 양떼의 그 보드라운 털 속에 파묻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고 있습니다. 아니 차라리 송두리째 양떼 속에 묻혀 구름처럼 흘러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