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면 까마득한 옛날이야기는 356년 전 이른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린 가슴에 낭만한 불을 사정없이 질러놓던 그리 예쁠 것도 없고 그리 미울 것도 없는 가녀린 소녀가 사라져버린 뒤 나는 어느새 고독을 무척 사랑하는 턱없이 외로운 소년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뼈에 사무치는 상처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쉽게 가실 수 있는 상처도 아니어서 어디라 없이 허전한 가슴 한 구석을 메우기에 무진 애를 썼던 것만은 숨길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무렵에 고보高普를 팽개치고 음악을 전공하겠다고 서울로 도망쳤다 돌아온 사촌동생 추엽秋葉이 나의 유일한 문학 동지로 그때 우리는 빨간 표지로 된 기타히라 하쿠슈北原白秋의 동요집과 노구치 우조野口雨情의 민요집을 탐독하면서 항상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눈물과 슬픔을 장만하는 여린 보헤미안이 되고 말았다. 모두가 새롭고 신비롭던 두 소년의 가슴에 감수된 대상은 그대로 기타히라白秋의 동요 비슷한, 우정雨情의 민요 비슷한 것으로 기록이 되곤 하였다.
이 어린 보헤미안의 사이에 불의의 틈입자가 있었으니 그것은 내가 열여덟 나던 이른 봄의 일이었다. 올백으로 넘긴 머리가 양복 뒷깃에 치렁치렁한데다가 키가 후리후리한 남궁현南宮炫이라는 미모의 이 청년은 나를 문학의 세계에 정주定住시킨 은인이라면 은인이요, 나를 이 불행한 구렁텅이에 몰아넣었다면 또 그러한 장본인이 바로 이 청년이었던 것이다. 백추와 우정의 세계를 맴돌고, 안서의 눈물겨운 감상과 무상에서 헤매던 나에게 괴테와 하이네를 일깨워주었고, 요한의 건강한 시세계로 나를 이끌어준 공로자가 바로 이 청년이었던 것이다.
살구꽃이 마냥 핀 봄날 나는 이 청년을 따라서 우리 고을에서 20리쯤 떨어진 계화도엘 가게 되었다. 살구의 명산지인 이 섬은 때마침 흐드러지게 핀 살구꽃 속에 온통 묻혀 있는 성싶었다. 바닷길 10리를 걸어가면서 그는 나에게 「로미오와 줄리엣」을 이야기해주었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도 이야기해주었다.
부드러운 봄 물결이 찰싹이는 해안에 자리 잡고, 꽃 싸움과 더불어 식물채집의 내기도 하는 동안 그 청년은 「창조」를 꺼내어 요한의 「불놀이」를 자못 흥겹게 읊어 주었으니 그때 서투른 일본말로 기타히라를 흉내 내던 나에게는 그대로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이 아닐 수 없었다. 생각컨대 시를 병처럼 나의 고질로 지니게 된 동기는 이때에 바로 발아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 뒤 나는 요한의 작품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찾아 읽었으며 「아름다운 새벽」도 책 광고를 보기가 바쁘게 사들였고 서울 동대문 밖에 있을 때에 조종현 시우와 더불어 맨 처음 찾아간 문인도 요한이었던 것이다.
해는 기울고요
울던 물새도 잠자코 있습니다
찰삭찰삭 흰 언덕에
가벼이 부딪치던
푸른 물결도 잠잠합니다.
이것은 그날 섬에서 하루해를 보내고 돌아와서 처음 우리말로 써본 내 시의 한 구절이다. 이것을 본 남궁씨의 찬사는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으나 그 실 나는 요한의 절창 「봄날잡이」의 기법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었다. 뜻하지 않았던 찬사에 백배의 용기를 얻게 된 나는 그 작품에 「기우는 해」라는 제목을 붙여 『조선일보』에 투고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하잘 것 없는 작품이 발표되자 매일같이 시를 쓰게 되고 그 뒤 5, 6년간에 걸쳐 조선 동아 중앙의 세 신문에 백여 편의 습작을 발표하게 되었다.
그렇게 4, 5년을 무료히 허송하던 끝에 일본에 건너가려던 숙망도 좌절되었고 생활이라는 거센 파도에 시달리게 되자 다시금 인생에 대한 회의와 불타는 향학심을 어찌할 길 없어 인생의 재출발을 다짐하고 문학마저 팽개치기로 결의한 다음 꾸준히 써 오던 일기도 불살라버린 뒤 노장철학을 섭렵하기 비롯하면서부터 나는 부단히 종래의 모든 기성도덕 윤리에 대하여 막연한 가운데 반기를 들었고 내 자신에 절어 붙은 유교로 달구어진 땟국을 털어버리기에 애를 썼던 것이다.
이리하여 한 걸음 전진을 꾀하고 찾아간 곳이 그 당시 동대문 밖에 있던 중앙불교전문강원의 영호映湖 박한영朴漢永 대화상大和尙의 문이었다. 그 길로 불문에 귀의할 것을 몇 번이고 다짐했으나 고향에서 나의 환향을 고대하는 어린것과 아내는 나의 귀의를 가로막고 끝내 어린 속한俗漢을 만들고 만 것이다.
10대의 소년기에 상처를 받은 뒤 문학에 지망했던 나는 다시 20대에 접어들면서 의지해 볼 철학을 찾았으나 또 한 번 나의 설계도는 무참히 찢어지게 되자 불문에 귀의할 것도 단념하고 다시 찾아간 것이 시의 길이었으니 그때 나는 옛 애인이나 고향을 찾아 간 듯한 희열을 느꼈을 뿐이다. 나에게 있어서 구원의 길은 노장철학도 불문도 아니었고 오직 문학의 길이었던가 싶다. 그러나 노장에서 배운 쥐꼬리만한 동양철학이나 불문에서 닦은 심오했던 사색은 그대로 내 문학수업의 밑바탕이 된 것은 사실일 것이다. 시인이 된 동기나 이유가 뚜렷할 리 없고 다만 나의 인간된 기질이 문학에 가장 가까웠던 것이 동기라면 동기, 이유라면 이유라고 해 둘까?
오늘도 어린 손주 강섭이를 무릎에 놓고 생각하면 내가 강섭이처럼 어렸을 때 우리 할아버지의 옛 모습이 역력히 눈앞에 떠오르는 것이다. 50대의 할아버지는 언제나 시우를 데리고 오셔선 긴 두루마리를 펴 놓고 한시를 쓰면서 오가는 술잔에 읊으시던 그 모습이다. 그때의 향긋한 묵 내음새가 금시 코를 찌르는 듯하다. 어찌 생각하면 내가 시를 쓰게 된 기질은 이 묵 내음새에서 배어든 것인지도 모른다. 시와 일생을 같이 마치리라는 산같이 굳은 나의 의욕도 이 묵에서 번진 것이리라
1959년 3월 2일 밤